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행주산성, 흘러가는 한강과 같이한 역사의 숨결이 깃든 덕양산.

덕양산(德陽山)의 해발고도는 약 125미터라고 합니다. 어찌보면 산보다는 구릉지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곳 덕양산에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권율장군의 지휘하에 승전합니다.

각종 자료에 따르면 권율장군은 수원 독성전투의 승전 이후 용인 광교산에 군사 4천을 주둔시키고 자신은 2천3백여 군사를 이끌고 한강넘어 덕양산에서 한성에 묶인 왜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왜? 권율장군은 덕양산에서 왜군과 전투를 준비하였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10배이상의 3만 왜군을 격퇴하였을까요?

덕양산에는 예로부터 토성(土城)이 있었으며 이것이 행주산성입니다. 토축산성(土築山城)으로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수없으나 이곳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여겨지는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도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볼수있을 듯 합니다. 삼국시대의 지도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각국의 중흥에 따라 한강유역이 영토에 편입됩니다.

덕양산 정상에 서면 저 멀리 사방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덕양산의 주변을 더 살펴보면 남으로는 한강과 접하고 동으로는 북한산에서 발원한 창릉천과 접하여 있습니다. 또한 북쪽과 서쪽으로는 넓은 평야가 있어 낮은 덕양산이지만 조망이 아주 뛰어남을 알 수 있습니다.

넓은 평야와 바다와 인접한 한강하류로 어족이 풍부한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백성들이 많이 운집하여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풍부한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쉽게 확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중에 많은 아녀자들까지 치마폭에 돌을 담아 투석전을 도울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강과 창릉천은 간단한 목책(木柵)만으로도 훌륭한 방어책이 될 수 있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다시 용인의 광교산에 4천군사를 주둔한 부분에 주목해 봅니다. 한성에 묶인 왜군은 북으로는 명나라군대가 서쪽에는 권율의 군사가 바닷길을 막고 있었으며 남으로 퇴각 길목에 광교산의 권율의 또다른 군사가 왜군을 독안에 든 쥐꼴로 만들어 버린 셈입니다.

덕양산 행주산성의 짧은 답사로 지략가이자 뛰어난 기상을 품은 역사적 인물인 권율(權慄, 1537~1599)장군을 스스로 재조명해보았습니다.

답사 후 사진과 자료를 올려봅니다.

[덕양산 주변 스카이뷰]

* 붉은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목책(木柵)의 흔적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토성(土城) 답사사진]


[덕양산 정상에서 바라본 광경]


[역사와 세월의 흔적을 담은 대첩구비]


[역사와 함께 흐르는 한강, 그리고 석양]

권율(權慄, 1537~1599)장군 영정